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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이기는 자의 축복 계시록 3:1-6

조회 수 31453 추천 수 0 2016.05.22 11:10:06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편지형식으로 그 당시의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형식의 묵시록입니다. 예수님은 계시록 처음부터 각 교회에게 선언하시기를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을 주신 의도는 각 성도들이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의 모형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 서머나 교회와 같은 교회, 버가모 교회와 같은 교회, 빌라델피아 교회와 같은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들입니다. 각 교회마다 상황이 다릅니다. 교회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고 박해와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교회는 승리할 것이며 각 성도들은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 교회 모형은 그 당시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일생의 신앙여정 가운데 개인적으로도 에베소 교회 유형의 삶에 처할 경우도 있고, 버가모 교회와 같이 성적으로 유혹을 받을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서머나 교회와 같이 가난, 실패, 핍박, 박해를 받을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세상적으로 잘 풀리고 형통하며 물질적으로 부요할 때도 있을 텐데 이런 각각의 상황에서도 신앙을 놓치지 않고 믿음의 승리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에 좀더 주님께 가까이 오다가 세상적으로 잘 풀리고 물질적으로 부요해 질 때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상태는 믿음을 놓친 경우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패배한 상태입니다. 주님이 일곱 교회마다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요점은 한 마디로 말하라면 끝까지 승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에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나머지 세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대 교회입니다.


다섯 번째 사데교회

사데는 서머나가 옛 리디아 지방의 수도가 되기 전까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도시였습니다. 무역이 발달하고 일찍부터 양털 가공업과 염색 공업이 시작되어 경제적으로도 큰 부를 축적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지형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적은 노력으로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할 수 있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사치와 향락을 일삼기로 유명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안정성 때문에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교만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데도시의 풍조는 사데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로 하여금 명목상의 신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데교회의 교인들은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있었을 뿐 경건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실상 죽어 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계3:1에서 주님은 사대교회를 향하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데교회의 소수의 성도들에게만 칭찬을 하셨고 전체 교인들에게는 이름만 교인이라고 하지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외형상으로는 교회건물을 세우고 형식상 예배는 드리나 실제로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 권면하십니다. 계3:2에서,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죽어 있거나 잠자는 자들의 영혼을 깨워 죽은 행실을 다시 살리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죽었으나 그 중 죽지 않은 자 몇이 남아 있으니 그 남은 자들마저 죽지 않도록 지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남은 신앙의 불씨를 살려 참되고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이루라고 권면하십니다. 동시에 끝까지 죽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 돌연히 임함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계3:3에서, ‘그러므 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 회개하여 신앙을 회복하지 않으면 도둑같이 이를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시는 대상이 그 당시 일곱 교회 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오고 오는 모든 교회들과 오늘날의 교회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꾸중만 듣고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였으나 그 가운데에도 아주 소수의 의인이 있었다고 본문은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본문은 남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남은 자가 끝까지 이긴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남은 자를 통해서 인류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남은 자였습니다. 온 세상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애급으로 이민간 야곱의 칠십인 식구가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북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꾾지 않은 칠천명이 남은 자였습니다. 사데교회는 온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으나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계3:4에서,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했습니다.


이 처럼 신앙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자가 끝까지 이기는 자요 남은 자들입니다. 이 이긴자들에게 예수님은 약속하시기를 계3:5에서,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약속은 첫째로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요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공표하고 자랑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 흰옷은 계시록 19;8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빛나고 깨끗한 흰 세마포 옷입니다. 생명책은 계20:15에서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지운다고 했는데 이긴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또 누가복음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주님 자신)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했는데 예수님은 이기는 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자랑할 것이라 했습니다.


여섯 번째로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빌라델피아는 주변의 여러 도시들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잦은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직물, 피혁공업의 발달 및 양질의 포도주 수출로 비교적 부요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따라서 이 도시 역시 당시 부요했던 부근의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우상숭배와 사치, 도덕적 문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포도주가 주요 산물이어서 이 도시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주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결과 방탕과 향략 풍조가 도시 분위기를 지배했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서머나의 경우처럼 예루살렘에서 도피해 온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델피아 교회의 성도들은 서머나 교회 처럼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박해 속에서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빌라델피아 교회의 교인들은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밀려 오는 그러한 박해를 능히 극복할 만한 조건을 부여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은 그러한 열악한 조건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충실히 지키고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께 열납되어 그들은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을 듣지 아니한 영광된 신앙인의 대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기들을 핍박했던 자들을 장차 굴복시키고 마지막 심판의 고통을 면제받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빌라델피아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완전하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열쇠에서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집의 열쇠에서 열쇠는 통치권, 주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열쇠는 천지 만물과 교회와 음부의 권세를 가지고 종말의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권까지도 가지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을 두셨다 했습니다. 이 열린 문은 천국문을 말합니다. 열쇠를 가지셨다고 했으니 그 열쇠는 천국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주님은 책망할 것이 없는 이긴자인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천국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빌라델비아교회는 책망이 없이 칭찬만 하셨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계3:8말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했습니다. 여기 작은 능력은 마태복음 25:14-30의 달란트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이나 은사가 크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신분이나 지위가 보잘 것 없으며 재산도 많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방면에서 사회적 부를 축적하여 당 시대의 그 어떤 부요한 도시 못지 않게 부를 누리고 살던 빌라델피아의 시민이었던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왜 자기 사회의 부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정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가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이 그들로 빌라델비아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기에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며 세상 명예와 제물의 유혹과 권력에 의한 핍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빵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신앙의 정조를 유보한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계2:20)이나 신앙의 정조를 버린 사데교회 교인들(계3:1)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이 땅에서의 안락을 취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자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오늘날 황금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앞으로 7년 환란이 오게 되면 지상의 모든 교회의 교인들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핍박 박해 궁핍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서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택하시고 그 실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계 3:9말씀에, ‘9 보라 사탄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를 말씀하시는데 여기 ‘사탄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란 혈통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면서 실상은 사탄의 종노릇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 칭찬만 들은 서머나 교회는 팝박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빌라델피아 교회도 핍박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계2:9에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했는데 계3:9에서도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는 교회들이 이런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핍박 박해하던 유대인들 중에 몇몇이 네 발 앞에 절하게 하리라 했는데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것은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나 마찬가지인데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서머나 교회의 형제 몇 명은 사단에게 내어 주어 환난을 입게 하겠다고 하셨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 몇 명을  교회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이 차이는 서머나교회는 신앙 연단이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계2:10의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은,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에서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에서 서머나 교회는 아직 환란이 남아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교회는 계3:8에서,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 말씀하심을 볼 때에 지극히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남겼기에 더 이상의 연단이 필요 없다고 주님이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천국의 문이 열려있고(8절) 시험의 때도 면제되었으며(11절), 면류관도 이미 주어졌다고 하신(11절)주님의 말씀은 이런 정황을 증명해 줍니다.


계3:10말씀에서 이 말씀은 세상 종말 때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에 초대 교회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이 초대교회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에 하시는 말씀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했는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말씀으로 환난 고통을 다 이긴 교회, 성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3:11절에서, ‘아무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면류관도 받았습니다. 면류관을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라고 하십니다. 프로 권투선수가 챔피언이 되어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챔피언을 빼앗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합니다. 챔피언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보유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면류관을 받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나 사데 교회는 전 교회적으로 타락했는데 그 중에서 소수의 성도들은 신앙정절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교회전체적으로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교회가 이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교회는 교회 전체적으로 구원받은 자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긴 자들인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상급이 많습니다. 먼저 11절에서 면류관을 주셨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으며, 셋째로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고, 넷째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 하나님의 성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할 것이라 했습니다. 계3:12에서,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첫째 상급은 면류관입니다.
둘째 상급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 즉 천국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광이 클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결코 다시는 나가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성전의 기둥이 무너지면 성전이 무너질 것임으로 기둥이 된 자는 성전에서 나갈 수도 없고 나가서도 안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성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성도에게 새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성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은 그 성도가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계21: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했으며 또 계21:9,10에서,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했습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이 그 사람 위에 새겨진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주권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을 보여 줍니다.


일곱째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내륙과 바다로 나가는 관문인 에베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무역이 성행한데다 양질의 양모를 생산하고 금융업이 발달하여 모든 시민들은 매우 부유하게 살았으며 다른 도시들을 훨씬 능가하는 부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발달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전체에는 큰 특색이 없었고 물 사정도 좋지 않아 먼 지방에서 물을 끌어 와야만 했는데 그러므로 그 도시의 물은 미적지근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유명한 안과 대학이 있어 안질에 잘 듣는 약을 조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 교회들은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이 라오디게아 도시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으므로 한 마디로 아주 좋은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최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일곱 교회 중 가장 최악의 저급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사데 교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가진 자유와 부를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삼지 않고 육신의 향락을 위한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요와 즐거움을 하나님의 축복이요, 영적충만이요 영적부요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들의 믿음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적지근하다고 하십니다. 여기 차다고 한 것은 전혀 복음을 받아 들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덥다는 것은 신앙의 열정으로 뜨거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덥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것은 완전히 세상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영적이지도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향락을 다 누리면서 아울러 천국에도 가고자 하는 무사 안일주의 및 신앙적 기회주의적 태도를 가진 자들을 말합니다. 이러므로 주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악 만큼이나 가증스러운 태도입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불신앙 만큼이나 가증스러운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께서 가차 없이 정죄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지적하는 것은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죄악입니다.라오디게아는 매우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부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 교인들 역시 전반적으로 부유한 수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이나 기타 헌금을 하므로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영적으로도 부요한 신자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황금 바알주의에 젖어 있어 물질적 부요를 영적부요를 가늠하는 척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물질적으로 부요한 교인들이 물질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멸시 천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했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부요를 즐기는 것으로 경건의 생활을 대체하려 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것만 취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부요해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도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돈으로 다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생활은 하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3:17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이들은 인생의 짐으로 곤고했으며, 영혼과 인격적인 면에서 빈곤했으며,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장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련한 인생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불쌍한 것은 자신들의 그런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서머나 교인들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으나 영적으로는 너무나 가난한 자였으며, 서머나 교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부요한 자입니다. 계2:9에서,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하면 영적회복을 할 수 있는 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계3:18에서,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처방책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주님께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라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연단을 통해 영적으로 순결하고 부요하게 되라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여기서 불은 시련을 말하며, 연단은 그 시련을 통과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로 연단된 순금은 거룩과 영적 풍요를 상징합니다. 베드로전서 1:7말씀에서,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했습니다. 순금은 불로 연단될 때에 없어질 수도 있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떤 불의 연단에서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므로 이렇게 이긴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모직물의 명산지였음을 배경으로 한 교훈입니다. ‘흰옷’은 의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져 속죄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죄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은 질 좋은 양모로 가리고 다녔으나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 곧 죄의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녔습니다.


셋째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달하였습니다. 그 중 안약과 고약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신의 눈은 밝게 했겠지만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는 것, 육신의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 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만 위하지 말고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고 주님은 풍자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3:19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했습니다. 내쳐 버릴 만큼 역겨운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사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책망하고 징계하고 계십니다. 20절에서,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했습니다. 이 문은 마음의 문입니다. 신실하고 충성되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던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계속 찾아 가실 필요 없이 하늘 문만 여시면 되었습니다(계3:8). 그러나 영적으로 죽어 있어 자신들이 계속적으로 짓고 있는 죄에 대하여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친히 찾아가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셔야 했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신자와 신령치 못한 신자간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대비시켜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문밖에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니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종말에 다가올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부끄럼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린다고 했는데 ‘서서’의 헬라어 원어는 ‘헤스테카’요 ‘두드린다’의 원어는 ‘크루오’입니다. 헤스테카는 현재완료형이고, 크루오는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서 계서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의 문에 인내하는 자세로 서서 문을 열 때까지 죄인을 위해 끈질기게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랑과 인내로 강권하시는 주님을 밖에 너무 오래 세워두는 결례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여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면,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먹을 것이라 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주님을 맞아 들이면 주님은 매우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 왔을 때에 맞이 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계3:21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 와 주로 인해 당하는 각종 환란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사 죄와 사망을 이기셨으며, 이기신 뒤에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마치 죄와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고 돌아온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 보좌에 함께 앉히신 것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을 자기의 보좌에 함께 앉히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7: 55-56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했습니다. 스데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곁에 앉게 되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성경 66권은 이기는 장입니다. 그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의 결론의 책입니다. 계시록의 서론인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에 이기라고 말씀하셨는데 계시록의 결론 부분인 계21:7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여 주신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끝까지 죽기 까지 믿음에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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