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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6개월 전에 누가복음 9:51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십 니다.  예루살렘 성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셔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서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성 고난주간을 보내셨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먼저 안나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아 예수님 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함으로 인해 신성모독죄목을 씌우고 사형선고를 받게 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보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빌라도의 심문 중에 있었던 일들을 사 복음서를 통해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두번째. 세번째 부인(마26:69-75, 눅 22:61-62, 요18:26))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 라 하며’

69절의 한 여종은 요한복음 18:16, 17에서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 문지기 앞을 지날 때의 문 지기 여종을 말합니다. 이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했을 때에 자신은 아니라 고 부인한 것이 첫째 부인이었습니다. 이 첫째 부인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안나스  대제사 장에게 심문 받을 때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71절에서 앞문까지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사건입니다. 여기의 앞문은 마가복음 14:68에서는 앞뜰이라 했습니다. 가야바의 집 바깥뜰과 안뜰 사이의 통로에 있는 출입구 였을 것입니다.   불을 피워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앞뜰(아랫 뜰)을 피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출입구에 가깝고 어두웠던 바깥 뜰로 피하였습니다.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 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집중으로 추구 당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의하면 두번째 부인과 세번째 부인 사이의 시간 간격이 한 시간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볼 때에 베드로의 세번 부인은 안나스와 가야바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시간적 간격을 두면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데 나사렛은 그 당시 특권 의식에 젖어 있던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천대받던 갈릴리 지역에 있었으므로 영예로운 이름이 아니 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투로 보아 이 여종 역시 예수님에 대해 멸시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제자들도 역시 멸시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72절에서, ‘베 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맹세하고 부인했다 고 합니다. 이중부정으로 철저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73절에서 이제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이 있게 됩니다.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 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조금 후’라고 했는데 이 때는 새벽 한 시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닭은 새 벽 12시 30분, 1시 30분, 2시 30분 경에 각각 울었던 것으로 여겼습니다. 닭이 두번째 울었던 시각은 1시 30분이었을 것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한 것은 그 시각 이전이었을 것입 니다. 따라서 이 때는 예수님이 붙잡혀 온 직후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집안 사람들에게 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기정 사실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26에 의 하면 베드로에게 귀가 잘렸던 말고의 친척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 여 부인을 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처음에는 그저 부인하는 것 같았으나 그 다음은 맹세하여 부인 했고, 드디어는 저주의 맹세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닭이 울었습니다. 이 때의 닭 울음은 두 번째 울음이었습니다. 첫 번째 울음은  예수님을 처음 부인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이 닭울음은 진짜 닭의 울음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고 합니다. 이런 나팔신호는 수탉 울음이라고 불리우는데  아마도 수탉의 울음소리를 흉내 낸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 렘에서 이런 나팔소리가 세 번 울렸다고 합니다.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했습니다. 누가복음22:61에는 이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 다고 했습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아 마도 이 때에 예수님은 가야바에게서 심문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가는 과정에 있었기에 베드로를 마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의 눈길은 아마도 사랑이 가득찬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과 연민의 눈길은 드디어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서 그는 밖으로 나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런 사실과 연관하여 베드로와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 다. 베드로는 그의 일생을 통해서 새벽마다 닭이 울때면 자신의 죄가 생각나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 니다. 또한 그는 평생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지냈다고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회심과 눈물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실패를 극복하는 신앙을 교훈하셨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도 실패의 경험이 있음을 알게 함으로써 그 당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잠깐 실수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성도들이 실패했을 때에 어떻게 극복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지금까지의 교회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연속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들 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박해와 위협과 고문에 시달려 믿음에서 실패한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때에 공산당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였습니다. 이 때에 고문에 시달려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 였지만 자기 속에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 라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베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했지만 하나 님은 그를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에게 큰 일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범죄하였을 지라도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가 롯 유다가 동일하게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범했지만 훗날 베드로는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가 되 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가롯유다는 죽음의 길을 택하여 영원히 범죄자의 오명을 씻지 못한 것은 모두가 진실된 회개의 여부에 달린 결과입니다.

둘째로 가롯 유다의 후회와 자살(마27:3-10)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 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본문은 가롯유다의 자살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롯 유다의 자살 사건은 산헤드린이 예 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처형하기로 결의하고 합법적인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유대 총독에게 예 수님을 이송한 니산월 13일 아침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정식회의는 낮에 모여야 정당성 을 부여 받으므로 해가 떠오르는 때를 기다렸다가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것 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죄목도 없었지만  겨우 찾아낸  불경죄목 역시 로마 총독 앞에서는 예수님 을 고소하기에 불충분한 죄목이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만한 정치적 죄목을 찾기 위해 의논했습니다. 우 리 본문의 기록이 가롯유다가 자살한 사건을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넘겨준 기사와(1 -2절), 예수 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기사(22-26) 사이에 언급한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사형결정이 허위와 조작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롯유다의 자살은 또한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나 불의한 자들의 악한 궤계로 죽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이 때에 가롯유다는 예수님이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볼 때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부정한 행태를 보면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가증했는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롯유다가 스스로 뉘우쳤다는 사실에서 그가 스승을 팖으로써 자기 스승이 사형을 당하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유다의 동기는 주님의 말씀대로 불경한 동기였으며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기 록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판값을 도로 돌려 줌으로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자신의 범죄의 증거인 은 삼십을 되돌려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리석은 행위는 그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갔 고 그 죄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 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에서 유다의 이 고백 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범죄하고 있는 악의 우두머리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장 로들에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영적 회개가 아니라 양심의 가책에서 기인한 넋두리에 불가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에서 배신자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함께 공모했던 동료였던 자들에게 뼈아픈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유다는 어떻게든 죄악의 무 거운 짐을 벗어 보고자 율법의 규례도 무시한 채 성소에까지 들어가 은 삼십을 든 돈 주머니를 성전 바닥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는 성전을 떠나 어디론가 미친듯이 달려가 스승을 배반하여 그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1:18에 의하면 목을 멘 후 떨어져 곤두박질 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 죽었다고 합니다.

‘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 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에서 가롯 유다가 던지고 간 그 은 을 대제사장들이 말하기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핏값이라고 한 것은 사람을 팔 아 살인한 대가로 얻은 돈이기에 핏값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성전창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 것은 신명기 23:18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제사장들은 창기의 번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못한다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 그들의 헌금을 돌려 주거나 혹은 사회적 자선금으로 운용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창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결정한 것은 결국 그들의 행위 가 옳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돈은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준 돈입니다. 이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무죄한 피로 자신들의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은 두 려워하지 않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다의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토기장이의 밭은  예루살렘 남쪽, 힌놈의 골짜기 언덕에 위치했으며, ‘악한 회의의 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이곳은 아마도 토기장이들이 점토를 파다가 점토가 바닥이 나자 버린 땅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버러진 땅이 아니 면 은 삼십으로 살만한 땅은 없기 때문입니다.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스가랴서 11:12, 13에,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 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 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13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피밭이라 한 것은 아마도 가롯 유다가 토기장이의 밭에서 자살 했거나 아니면 그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 밭을 피밭이라 불린 근본 이유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제 일차 빌라도의 예수님 심문(마27:11-14, 요18:28-19:1-16)
‘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사전 각본에 따라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이미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비록 산헤드린공회라 할지라도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의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의 반박을 고려하여 가급적 정치적인 사건으로 위장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이송시켜 합법적인 사형선고를 받아내려 하였습니다.  본문은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 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게 됩니다. 

먼저 마태복음27:1에는 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의 왕이 라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소했다고 하 는데 누가복음 23:2-3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세 가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가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지 시켰다는 것이요 셋째는 예수가 자칭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소 내용들은 산헤드린 공 회에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음으로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정죄한 판결과는 매우 다른 고소 내용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 세우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은 그리스 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왕’이냐는 정치적 용어로 묻고 있습 니다. 아마도 종교지도자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밝힌 자백은 종교적인 진술로서 로마 법 에는 저촉되지 않을 것이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빌라도에게 고소한 것 같습니다. 무론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등식이 항상 성립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란 말 대신에 정치적 용어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로 예수님을 고 소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반란자나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에게는 민감했으므로 이런 고소 는 그럴듯하게 먹혀 들어갔을 것이며 예수님을 처형할 충분한 구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면서 말씀하신 유일한 대답입니다.  그 이후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셨습 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요(마2:2), 온 인류와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로서의 왕임을 긍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의미하는 왕과 예수님이 의미하는 왕의 개념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전혀 다른 개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의 개념은 창조주요 구세주 로서의 왕의 개념인 것입니다.

고소자들은 수 없이 고소를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12절, 14). 빌라도가 심 히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3: 7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했습니다. 묵묵히 아무 변론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께 자신에 대해 변론을 하도 록 빌라도는 촉구하고 있습니다.  알맹이 없이 무수히 빗발치는 유대인들의 고소는 빌라도에게 조 차 가증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빌라도는 될 수 있으면 예수님께 유리한 무엇을 제공하려 했습니다. 사실 포악하고 교활하며 자기 이익에는 천하 누구보다도 눈을 밝혔던 이 로마인이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기이히 보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에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예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고 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일차로 선고합니다. 이 때에 무리들이 더욱 강하게 고소를 합니다.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에서 여기 무리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에 호산나,호산나로 환호하던 일반 대중이 아니고 산헤드 린 공회원들이 매수한 자들입니다. 빌라도 법정은 이른 아침입니다. 지난 밤에 엄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해서 밤새도록 안나스가 심문하 고 가야바에게서 예비 심문을 당하고 해가 뜨자 마자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아 새벽에 빌라도 법정에 세웠었기에 일반민중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 하던 일반대중의 마음이 변해서 예수님을 고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나 안나스나 가야바 저택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특히 빌라도 법정에 참여할 수 없었습 니다. 이 무리들은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의 종들이었으며 또한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가솔들 이며  그들이 매수하여 모은 무리들입니다. 이 무리들이 더욱 강하게 고소합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는 빌라도의 결정에 반대하는 무리들의 움직임이 점점 소요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사실 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8, 19장은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는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있었던  말씀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따로 다루려고 합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요한복음 18:28, 29에서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빌라도 관정 에는 들어 가지 않아 빌라도가 관정 안과 밖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는 일곱 번 정도 관정 안팎을 들락거리면서 바쁘게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롯유다의 은 삼십을 성전고에 넣지 않은 것이나,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들을 볼 때에 경건의 모양만 나타내면서 그들이 행하는 죄악은 깨닫지 못하는 외식자들 임을 보게 됩니다.

이 관정은 본래 로마 군대의 진지 안에 있는 장군의 장막을 가리켰습니다.  이것이 후일에 로마 총 독 관저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한편 총독은 평소 갈릴리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나 유월절 축제가 있어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때는 소요를 대비하기 위해 임시로 예루살렘으로 이동했습 니다. 이 때 총독이 머물었던 곳에 대해 유대 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총독들이 호화로왔던 헤롯의 궁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빌라도는 아마도 성전 지역 서북쪽에 로마 군인들이 주둔 하던 안토니아 성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빌라도의 예수님 심문을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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