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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본래 성자 곧 2위 하나님이셨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위한 성 고난 주간 중 예수님의 체포와 수난이 숨막히게 진행된 바로 그날인 금요일 새벽과 오전 중에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시고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던 가야바에게로 끌려가던 중 이전의 대제사장 이요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에서 그의 심문을 받게 되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8:12-27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안나스에게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음은 물론 실제적인 주요한 심문이 이미 이루어졌던 안나스 에게서의 심문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던 예 수님의 심문 현장에 요한이 있었다는 사실과 베드로가 어떻게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 갈 수 있었는 가를 상세히 밟히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 저자인 요한이 목격자로서 세부적인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당시의 정황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대제사장들 의 집에 잠입

‘12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13먼저 안나 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가야바는 유 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본절 이후로는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기사와 함께 본격적인 주님의 십자가의 길이 시 작됩니다. 예수님은 유대 교권자들의 심문을 시작으로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고 십 자가에 못박히시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로마 군대의 천부장 이 동원되었습니다. 대제자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대를 동원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천부장은 240명의 기병과 760명의 보병으로 구 성된 부대의 지휘자입니다. 이 천부장과 로마군인들이 동원된 것은 공식적으로 예수 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입니다. 실상 그 결박은 죄인인 우리들이 당해야 할 것이었으나 주님은 그 자신을 결박하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결박은 무고히 결박당 했던 이삭에게서 이미 예표되었습니다.

이 군대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했습니다. ‘먼저’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안나스와 가야바 두 사람에게서 행해진 심문을 구별하기 위해서 입 니다. 이 말을 통해 후에 있을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안나스에게서 예비 심문을 받은 것은 재판을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될 때까지 예 수님을 안전한 곳에 가두어 두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샘 하며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이른 새벽에 안나스 집으로 끌려 왔습니다.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낮에만 열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두 제사장의 집은 같은 뜰 안에 있었으므로 이동을 위해 많은 시간이나 절차를 소요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 습니다.

한편 안나스는 AD6-15년 까지 대제사장의 지위에 있었던 자로서 복음서가 기록 하는 예수님의 시대와 그 이후 사도들의 시대까지도 이 사람과 관련된 가족들이 대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9년여를 재직하던 그는 로마 행정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에 의해 축출당했으나 그 후에도 1년간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으로 있었습 니다. 그리고 약 1년의 공백기 후에는 그의 사위였던 가야바가 AD18-36년까지 오 래도록 대제사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비록 대제사장직을 다른 사람 이 차지하게 했어도 종교와 정치계의 대부로서 막강한 실권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먼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 해의 대제사장 의 장인이라’는 구절에서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대제 사장들은 로마정부나 헤롯왕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 해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 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여기 또 다른 제자는 사도 요한 자신을 말합니다. 이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림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대제사장집안과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까? 여기 안다는 말은 헬라어 ‘그노스토스’인데 다만 면식이 있는 사소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지’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한정된 관계를 지칭합니다. 그것은 당시에 갈릴리와 예루살 렘 간에 소금에 절인 생선의 거래가 활발했다는 것에 착안하여 고용인을 거느린 세베 대가 어업뿐 아니라 생선 유통까지 관장한 유력 인사였던 것으로 보고 그의 아들이었 던 요한 역시 대제사장 가족들과 거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집안 가속들도 요한을 알아 보았고 요한은 거침 없이 대제사장 집 뜰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이 대제사장 집 뜰 안으로 들어간 후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문에 바짝 붙어서 서성거렸던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을 아는 요한 이 다시 나와서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해서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옵니다. 그런데 요 한과 안면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재판이 열릴 중대한 시점에 신분이 확인되 지 않은 사람을 들여보내줄 수 없었으며 더구나 문지기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 자라는 어느 정도의 심증이 있었으므로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했고 이 여종의 질문은 베드로를 충분히 당혹하게 했습니다. 한편 이 문맥의 상세한 기록은 저자 요한이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이 결국 자신에게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 리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법정 안으로 데려온 책임을 말하며 베드로의 부인을 전적인 베 드로의 잘못으로 돌리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의 실수는 제자들 모두와 나아가서 요한의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과 더 궁극적으로는 오늘의 나를 포함 한 전 인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첫째 예수님 부인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에서 이 문지기는 요한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미 베드로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종은 ‘아니오’ 라는 답변을 예상하는 정중한 듯 하지만 유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한편 여기서 예수 님을 ‘이 사람의’라는 말 속에 이미 경멸적인 어조가 들어 있었으며,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경멸적인 모욕이 됨과 아울러 베드로의 부인을 한층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신을 보호해 줄 실력자도 없었고 여종의 질문도 이미 ‘아니오’란 말을 예상한 질문이 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란 신분의 노출이 자신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베드로는 그만 운명적인 부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22:31-32말씀에‘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 려고 요구하였으나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 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했습니다. 사탄이 베드로, -‘너희를’이라 하여 제자들도 포함-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가지고 놀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 다고 하지만 교묘한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사 탄이 누구에게 그렇게 하려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욥기서에서도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탄 이 하나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를 해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위해 중보기도 했 습니다.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에서 여기 불은 숯불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의 숯불이 다시금 예수님 이 부활하셔서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베드로를 만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도 숯불 앞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던 기억을 되살리며 이를 철저히 회개케 하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금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요한이 복음서에 이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의도적인 배려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신분이 노출된 베드로는 남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숯 불을 중심으로 모여선 사람들에게 끼어드는 것도 위험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무리 들과 떨어져 있으려니 더 눈에 잘 뜨이게 될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추위를 느꼈을 것이므로 불가로 가 서 불을 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주님께서는 한밤 중 한기에 채찍질 마저 당하시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셋째로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시다(요 18:19-24)

‘19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20예수께서 대 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 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1어찌하여 내게 묻 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 니라.’

이제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십니다.  이 대제사장이란 공식 직함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이기에 그 때 사람들이 안나스에게 대제사장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물었습니다. 안나스는 자신의 경험이나 그의 첩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교훈이나 제자들에게 관해 잘 알고 있었으나 이 질문은 심문자의 의 례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이었습니다. 특히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체포로 소요사태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마치 무슨 골치 아픈 사람이나 되는 듯 심문하고 있는데 가증한 교권주의자 가  이 땅의 구속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심문하는  것은 주님에게는 극단적인 치욕이었을 것입니다.

안나스의 질문 핵심은 제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 대해 직접 답변을 하 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신변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것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관해서 당당하게 증거하십니다. 잘못된 권위로서 예 수님의 가르침을  합리적 이유 없이 멸시하는 대제사장의 상투적인 질문을 자신의 가르침이 공개 적이었다는 증거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어떤 비밀스럽고 사악한 것이 들어 있지 않았나 하는 복선 깔린 안나스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개적이고 정당했던 말씀 사역 활동을 들어 반박합니다.

‘2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1어찌하 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 을 아느니라.’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말씀하신 것 은 자신에게 자백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적법 절차에 따라 증인을 불러 올 것을 요구 하시는 항의조의 답변입니다. 본래 유대 재판법에는 증인이 동석해야 했고 재판받는 자를 변호하는 증인들도 참여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아울러 그 당시의 예수님의 연행은 정당한 고소인도 없이 자신을 체포한 불법적인 것 이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공개적이 고 떳떳한 가르침과 대조적으로 합법적인 절차도 갖추지 않은 불접적인 심문과 재판 을 강행하려는 교권자들에 대한 정당한 지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관례를 볼 때에 예수님의 행동은 놀라운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재판관 앞에 취할 수 있는 일반적인 태도는 겸손, 소심함, 자비를 구함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자신의 가르침에 충실함 을 확신하는 표현입니다.

‘22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 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 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2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안나스에게 대든다고 하여 손으로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본래 유대인 들에게 있어 뺨을 치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므로 금기시되 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에게는 가혹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때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치욕적인 모욕이었으며 이것은 이사야 50:6에, ‘6나를 때리는 자들에 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 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에서 대제사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이 하 속은 경멸적인 어조로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범죄자라고 해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은 강요당하지 않도록 되어 있으며 적법한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 히브리 법이건 만 그러한 기본적인 권리조차 갖지 못하고 당하시는 주님의 모욕은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 당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한쪽 뺨을 맞으신 후 다른 편 뺨을 돌려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마5:39).

그것은 주님이 평소 가르치셨던 것을 시행하지 않는 언행 불일치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복수를 하지 말라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가장 큰 사랑을 가진 자라고 하신 말씀(요15:12-14)을 실천하 시려는 가르침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실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기위해 옮겨 갑니다. 요한 복음은 가야바에게 받은 심문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상세하게 언급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마태복음 26:57-68으로 돌아 갑니다.

넷째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마 26:57-68).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 이 모여 있더라. 58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 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이제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로 끌려가 재판을 받 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한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께서 과연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심문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메시야되시는 지의 진실 여부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음에도 자신의 메시야 증거를 통해 십 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하나님 아들임을 분명히 밝히심으로 메시야의 구속사역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산헤드린은 결국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고 맙니다.

‘59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61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공회의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사실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 필요한 거짓 증거를 찾고 있 었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와서 많은 증거를 대었으나 일치하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두 증인이 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증거했는데 여기 두증인 은 공회가 매수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하지 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너희가 헐면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의미 는 성전인 자신의 몸을 죽이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증거 마져도 일치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63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 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 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했습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지만 예수님은 잠잠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 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라고 물은 것은 유대인 법전에서 피고에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는 전통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 지금까지 고발에 있어서 증인 확보에 실패했으므로 이제 대제사장이 법정에서 말의 꼬투리를 잡아 불리한 증거를 도출해 내기 위한 사악한 수법인 것입니다.  증인확보 에 실패해서 예수님을 처형할 수 없었기에 각도를 바꿔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이 질 문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이 메시야임을 자주 말씀 하셨기에 메시야가 아닌 자가 메시야라 주장하는 것은 참람 즉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므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음흉한 질문을 했습니다.  가야바는 이 질문을 통해 종교적으로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씌우려 했고 정치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씌우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거짓 증거에 대해서는 침묵하셨 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생명을 건 답변을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서도 침묵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64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야바는 자신의 옷을 찢어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시를 했습니다. 본래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고통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이에 동 조하지 않으며 선민으로서 분노를 표현하는 상징적 행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관례화 되어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상대방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말을 신성모독죄로 규정하여 자신의 옷을 찢음으로써 예수님을 처 형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한편 당시는 외식주의가 극에 달해 있었을 때로서 옷을 찢 는 지점과 방법과 치수까지 정해 놓았으며 한번 찢는 옷은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 이런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더 이상 증거와 증인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 하니라 하고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에서 저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몰고 가는 가야바의 선동에 사형으로 환호합니다. 이 결정은 예수님께서 전혀 반론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 판의 부당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뱃고, 손바닥으로 얼굴 을 때리고 희롱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내어 로마 법정에 세웁니다.

결론으로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결코 낙심치 말고 그리스 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비록 자신이 어떤 멸시와 수치를 당하 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 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에게 씌워지는 거짓 죄목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지만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고 생명을 걸고 답변을 하셨듯이 우리도 이처럼 어떤 위협이 닥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지 않는 성도 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장차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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