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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KBS의 시사교양의 천상의 컬렉선 44번째의 3개의 내용들은 가야에 대한 내용들이 었습니다. 첫번째 보물은 가야기마인물토기였습니다. 말을 탄 기사가 투구, 갑옷은 창, 방패는 물론 말에게 까지 철기로 무장했었습니다. 이 토기를 보면서 가야국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에 철기문화를 꽃피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세기 때에 가야가 철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 당시의 철갑옷이 발견 된 곳은 가야국 외에는 없었습니다. 철갑옷이 70여 벌 발견되었습니다. 이 철갑옷은 못 80개로 이었는데, 두께가 1mm이며 무게가 10kg안밖의 가볍고 단단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갑옷의 무게는 무려 50kg이어서 이 갑옷을 입기 위해 3 사람이 거들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소개되는 보물은 코발트 파란 유리 구슬 목걸이였습니다. 이 코발트는 지구상에서 0.001% 의 희귀 광물로서 한반도에는 없는 광물입니다. 이 파란 구슬 목걸이는 테국의 푸카오통과 스리 랑카의 만타이 그리고 베트남의 옥에요 항구 도시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이 세 나라의 도시들 의 공통점은 항구도시입니다. 2000년 전 1세기 시대에 해상무역이 발달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파란구슬 목걸이가 가야로부터 5000km 떨어진 인도에서 전 세계로 수출 되었는데 가야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야 항구 도시는 그 당시 일본, 한나라, 로마 등 70개국과 교 역이 이루어졌었는데 어떻게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 이런 나라들이 모여 왔겠습니까? 그것은 가 야가 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야는 그 당시 해상 실크로드의 기착점이었습니다. 그 당시 철은 돈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천상 컬렉선 44번째의 세번째 보물로 소개된 것은 허황옥의 사파석탑(婆娑石塔)이었습니다. 허황옥과 가야 국왕 김수로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소개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 아요디아왕국의 공주였는데 왕이 어느 날 꿈에 가야국의 김수로와 결혼해야 한다는 신의 계시를 받아 부모의 권유에 따라 가야로 가기로 결심하여 항해를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심한 풍랑으로 인해 실패하다가 사파석탑을 배에 실었더니 파도가 잠잠하여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가야에 도착했는데 김수로왕이 신하 둘만 보냈기에 허황옥공주가 2 5천리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해서 김수로가 직접 찾아가 맞이해 결혼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까지 긴 서론을 이야기 한 의도는 김수로왕과 허황옥과 가야가 어떤 나라인 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천상의 컬렉션을 보고 가야에 대해서 그리고 허황옥에 대해서 좀더 알아 보기 위해서 인터넷과 김성일 장로님의 여러 책들을 다시 살펴 보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이 내용이 진실인가 에 대해서 알아봤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여행]과 고운사람들/우리들 교회  웹사이 트(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rh2&articleno=13388305)와 공주제 일교회 중고등부 웹사이트에서 참고하였습니다. 이 웹사이트의 내용들이 다 비슷했습니다.

김 성일씨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빛으로 땅끝까지2와 수 많은 웹사이트 참조 특 히 공주제일교회 중고등부 웹사이트에서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에 대한 참조 책들과 교수 학자들 을 소개하였습니다.

김병모 교수

옥스포드 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 학사

한양대학교 문화 인류학과 명예교수, 고려문하재연구원 이사장, 외교통상부 문화외교 대사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한양대학교 박물관 관장

조국현박사

1988 가야국이 기독교국가임을 최초 발표삼국유사 중 가락국기 해설가락국 20 연구, 도마박물관 관장, 목회자

 

정학봉박사

한국역사철학자, 대신대 대학원원장인도 18 방문하며 조국현 박사의 이론 입증.

 

이장식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B.A), 장신대 신대원(Th.B), (Th.M), 서독 뮌스터대학 신학부,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부(Th.M), 미국 드류대학 대학원(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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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가야의 김수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김수로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황금알 설화입니다. 김수로왕(재위:42199)은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로 수릉이라고도 합니다. 『삼국유사』제 2권의「가락국기」에 김 수로왕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그에 따르면 42 3월에 구지봉에 9부족의 족장들 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붉은 보자 기에 싸인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 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김수로 왕도 그 중 하나이며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흑해의 스키타이민족

김수로왕은 흑해 옆에 있는 스키타이 출신 왕자입니다스키타이민족은 문자가 없으면서, 금은 세공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신라의 금관, 귀고리 등에 보이는 점이 찍히는 무금 세공법 스키타이민족만 가능한 것으로 나중에는 신라에 전래됩니다. 참고로 농경문화는 옥을 숭상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보물은 대개가 옥입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맨 먼저 중국으로 들어온 보물도 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금을 숭상 합니다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흡수되었 기 때문에 신라는 백제, 고구려, 일본, 중국에서도 없는 금문화입니다.  스키타이족은 황금장 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 안치하고  위에 돌을 쌓아 올린 소위 적석 목곽 분이라는 무덤양식이 특징입니다(신라와 같음). 스키타이족 흉노족 또는 훈족으로 불 리는 북방 민족입니다.  

 

, 당 시대 때는 돌(투르크=위구르=터키)이라 불렸고그리스시대스키타이로마시대훈족 등으로 불립니다.  흉노족인 스키타이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동이 족 계열에 속합니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도 김알지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 다.  AD682 문무왕 사후 세워진 비석이 경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 터에서 발견됐습니다. 정 조20(1796) 조각들이 발견되고, 1961년에는 비석 상단이 발견됐습니다. 경주국립박물 관에 있는 문무왕 비문에는 신라의 조상이 흉노족이라고 밝힙니다. 김일제는 한무제시절에 흉노 족과의 싸움에서 한무제가 잡은 흉노왕 휴도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한무제가 말 사육일을 맡겼 는데  나중엔 한무제의 경호실장까지 됩니다. 고향이 알타이()지방에서 왔다고 해서 김씨 성을 붙여줍니다. 중국문헌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 나라의 손권이 고구려를흉노의 이라는흉노의 선우라고 지칭 한데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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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입구. 왼쪽에 문인은 신라사람이고 오른쪽 무인은 흉노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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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괘릉에 있는 무인석상입니다신라 원성왕릉(785~798,김경신앞에 있는 것으로 AD 700 스키타이민족과의 교역을 보여줍니다. 얼굴 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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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의 청동   

김수로왕의 유물 중에는 김수로왕이 들고 청동 솥이 있습니다 청동솥은 쇠꼬챙이로 꿰어 서 고기도 삼고 차도 끓이는 유목민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김해에서 발견되었 습니다 발견으로고학계는 김수로왕 스키타이 사람이라고 다시 굳히게 됐습니다. 가야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북방 기마민족임을 보여 줍니다. 청동기로 살던 한반도에 철기문명을 보급 한 것은 김수로왕입니다.  이렇게 스키타이족은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기마민족입니다.

 

김수로왕은 유태계 스키타이인이었습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3:11 나오는 '스구디아인'바 로 스키타이인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야만족인데 유대인들이 그리로 와서 유대인 스쿠디아 인이 됩니다. 이들은 철기 문명을 가졌습니다. 당시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이 이렇게 거미줄 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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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봉교수 의하면 거기서 성을 쌓고 정착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남하하게 되었고 고구려, 신 라, 백제 등에도 많이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김수로왕은 삼국의 틈새 땅인 오늘날의 김해지역으로 와서 가야를 세운 것입니다김수로왕은 스키타이에서 이주해 중국의 소호 김천씨 라는 마을을 거쳐왔기 때문에  성을 갖게 됩니다. 김해 박물관에 가면 스키타이인이 왔다는 유적이 있습니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 각배 (ship), 황금장식 북방유 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혼혈로서 스키타이계 유대인 이라 추정해봅니다.  이로써 가야와 신라의 김씨계가 산동반도에서 회 귀한 고 아시아계의 동이 족 임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또한 한민족 기원 대탐사를 집필한 김성일과 고대 근동 고고학 전 공자 장국원과 베이징대학 고고학전공 이벤허 박사는 말하기를  "진秦 과 한漢의 정권이 계속되 면서 산동성의 동이족들은 만주와 한 반도로 갔다. 그 중의 일부가 금관 가야를 세운 수로왕과 신라의 김씨계 왕족이었다." 고 했습니다.

 

기원후 얼마까지 세계를 다니면서 상업을 민족은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인들끼리 의 해양무역 맡고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을 말합니다심지어 불교 신문에서도 불경을 나른 사람은 100% 유대인이라고 한답니다. 정학봉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6일을 그렇게 이동하다 가 7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려야 하므로 크고 작게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회당을 만들었다 는 것입니다.

 

둘째로 도마의 사역 행적

예수님의 제자 사람인 사도 도마가 해양 실크로드의 마지막 항구인 땅끝 나라 한국 김해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도마는 40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다 순교했습니다. 도마의 사역은 전반기 20년은 에데사 탁실라한국의 가야에서 사역을 하였고, 후반기 20년은 인도의 호칭 챙나이에서 활동했습니다. 도마 인도 선교는 수리아의 교부 에브라임 다른 전승들에서 기록되었으며,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교회사 5 10장에서 바돌로매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히브리 마태복음을 남겼다고 나와있습니다.

 

도마는 AD 40년 전후해서 드라비다족이 살던 인더스강 하구에 상륙하여 인도북부로 들어가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AD72년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드라비다 사람들이 물고기 암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도마가 전한 예수복음을 물고기 즉 드바비다 어로 가야의 복음이 되었고, 가야 지역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어 그 지역 이름을 가야라 지 었다고 합니다. 현재 아요디아 시의 동쪽에 가야라는 도시가 있다고 합니다. 아요디아의 공주 허황옥은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동방의 김수로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와 결혼을 해서 AD46년 김수로의 나라를 가야라고 지었고 현재 김수로왕의 왕릉에 물고기 두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 방법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당시 사도들의 전도전략상 사도 도마가 인도에 왔을 찾아간 아유타족 역시 유대인 혈족입니다. 그런 연유로 사도 도마가 한국에 왔을 김수로왕이 유대계 디아스포라였던 관계로 만난듯 합니다. 사실 BC 1000 솔로몬 시대 때부터 유대인들은 세계를 다니면서 무역했습니다 (왕상9:26,10:22). 그곳이 에시온게벨이란 항구입니다. 물론 지중해를 통해 유럽지역과도 교 역을 했지만 에시온게벨은 그 위치상 교역 대상국이 다릅니다. 이곳이 실질적인 해양실크로 드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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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는  끝이 인도인 알고 왔었습니다 당시 인도 역시 로마의 동쪽 속국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도까지 왔었는데 막상 인도에 와서 보 니 인도와 교역하는 끝인 한국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당시 가야와 인도는 많은 교역을 했답니다.  AD 42~47년까지 한국에 6년간 머무르며 김수로왕에게 세례 주고 인도로 돌아 갔습니다.(삼국유사 기록된 연대)

 

AD 48년에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했습니다. 도마는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총회에 선교 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인도에 들렀습니다. 인도로 도마는 허황옥의 아버지에게 가야에 김수 로왕이 모든 혼처를 마다하고 허황옥을 기다 리고 있다는 정보를 주게 됩니다. 허황옥의 나이가 16 때에 김수로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합니다(가락국기). 가락 국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허황 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꿈을 주었다고 합니다. 도마가 가야에서 김수로에게 허황옥을 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도의 부모에게 동시에 계시하셨습니다. 허황옥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죽으면 죽으리란 심정으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라..."(삼국유사 가락국기 -일연스님-) (*상제 말은 하나님입니다우리나라 최초 성경에도 하나님을 '상제' 번역했습니다

 

사도 도마는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시켜주고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여 선교보고 하려 고 떠납니다. AD 50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습니다(서양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52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였습니다(인도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72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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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 서두에서 KBS 천상의 컬렉선 프로그램에서 삼국유사의 가락기에 의하면 허황옥의 아버 지가 꿈에 신이 나타나서 가야 나라의 왕과 결혼해야 한다고 해서 가야의 김수로에게 와서 결혼 을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면부지의 외국 처녀가 먼 외국에 까지 올 수 있었으며, 또 어 떻게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선 뜻 아내로 맞이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안았습니다. 그 의문이 여기에서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허 황옥 부모가 딸을 생면 부지의 외국 나라에 혼신으로 보낼 수 있었겠으며, 또 김수로 역시 먼 나 라에서 온 공주를 아내로 맞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셋째로 허황옥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 간택을 건의 하자, 수로왕은 자신이 천손강림하였으니 배필도 하늘이 정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붉은 붉은 휘날리며 허왕후가 배가 서남쪽에서 나타났다. 망산도(진해 용원으로 추정) 정박한 허황옥은 수로왕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아유타국이며, 상제의 명에 따라 그대와 혼인하러 왔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습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에 있는 겐지스강 아이오아라는 조그마한 읍입니다 옆에 페자바드란 도시가 있습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는 약초, 향신료 등을 수출하는 아유로베다 무역상을 했던 소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은AD 4 8년에 한국(가야) 시집 왔습니다.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들고 온 물품들을 보면 당 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됐던 물품들이었습니다. 이런 물품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도 들어오게 것입니다. 당시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사도 도마가 에데사를 거쳐서 탁실라(터키 이슬라마바드 )에서 왕궁을 짓고 인도 아유타국을 거쳐올 때에 허황옥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참고로 도마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인도 의 군다포러스왕의 왕궁터와 동전이 발견되고, 또 군다포러스 왕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도마의 인도선교와 도마행전에 기록된 왕국건축가라는 사실은 학자들도 동의합니 다.  인도에 도마는 한국에도 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부활절에 가야국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보고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인도에 들립니다(추정).

 

서울대학교 서정선교수의 DNA검사에 의하면 김해 대성동 고분 박물관에는 허황옥과 김수로 왕의 후손들의 유물이 있습니다거기서 발견된 뼈의 DNA검사 결 과 허황옥은 인도의 타미린 과 같은 염색체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허황옥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많은 설이 잠잠 해졌습니다.  지난 2000년 김해시는 국내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최초로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 식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2017 3월 김해시는 아요디아의 사라유 (Sarayu) 강변에 허황후 기념 공원 조성을 위한 기념비 제막 행사를 가졌습니다.

 

넷째로 허황옥의 사자석탑

 

KBS 천상의 컬렉선에서는 허황옥이 가야로 오기 위해 여러 번 항해를 시도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실패했는데 사자석탑을 배에 실었더니 파도가 일지 않아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식으로 지어낸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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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사 전문가인 박필수씨는 그게 외국에서 돌이라고 합니다. 오랜 옛날, 이진 포구가 커다란 항구였고, 천하에 흉년이 들어도 지방만 먹을 것이 넉넉했기 때문에 나라에서 배들이 곡식을 사러 왔던 얘기라 합니다. 당시에는 원거리 항해용 선박은 돛단배였다. 돛단배는 위쪽에 달린 돛으로 바람을 받아 움직이기 때문에, 아래쪽에 무거운 것을 실어서 무게 중심을 낮추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배가 쉽게 뒤집히니까. 그래서 배로 곡식을 사러 오는 이들은 밑에 돌을 실어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추어서 왔다는 것이다. 곡식을 싣고 돌아갈 때는 곡식 가마니의 무게 때문에 돌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종기는 김해 수로왕릉에 있던 파사석탑의 석재가 한반도에서 나오는 종류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 황옥공주의 바닷길을 탐사해서 밝혀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진마을의 돌담을 이루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돌들 중에서도, 이 땅의 것이 아닌 돌들은 유난히 눈에 띤다. 마치 먼 타국의 외국인이 우리 속에 섞여 있으면 눈에 띄듯이《가락국기》 원문에, 허황옥 공주를 가락국까지 데려다 주었던 뱃사람들 15명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는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자. 김수로왕은 공주가 오는 날짜에 맞춰 크게 환영행사를 열었고, 공주를 태워온 20여명의 뱃사공들에게 큰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 8월 1일 돌아가는 배에 총 150섬의 쌀과 300필의 베를 싣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올 때 “파도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싣고 왔던 무거운 돌들을 내려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허황옥이 시집 오면서 가지고 왔던 그 돌들은 사자석탑이 아니라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 고 왔던 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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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탑으로 쌓아놓았습니다. 물론 돌들은 인도 산으로 판명됐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의 기록대로 구지봉을 비롯하여 파사석탑이 있는 일대가 모두 바다였습니다. 김해박물관에 전시 된 조개무덤 패총 지금의 김해가 옛날에는 전부 바다였다는 증거입니다. 김해평야 만들어 진 것은 3세기입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로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도마는 과연 가야에 왔었는가

 

불교계에서는  '허황후가 불교를 들고 들어왔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고려 (AD 1281) 일연스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 다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3 [금관성 파사석탑] 

"그때 (김수로왕과 허왕후 시대)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부처님 화상과 교리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으로 토박이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 8 질지왕 2 임진에 이르러 비 로소  땅에 (왕후사) 세웠고..."했습니다. 일연에 의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시기는 가락국의 건국(AD 42)보다 훨씬 이후입니다. 삼국유사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를 고구려 AD 372, 백제418, 가야 AD 452, 신라 AD 527 년이라고 밝혔습니다. 불교가 중국 에 전래된 것은 AD 67년입니다. 영향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AD 372), 백제는 AD 418년에 전파되었습니다. 가야는 AD 452 (8 질지왕 2) 때에 왕후사 절을 세웠습 니다. 

 

신라는 AD 418 (신라 눌지왕 2)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 나 신라왕가에서 반대하여 3년간 숨어 지내다 끝내 허락 받고 흥륜사를 지으며 불교를 전파하 였으나 신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후 신라는 AD 527 법흥왕  하급관리 이차돈이 순교하고 다음 AD  528 불교를 공인합니다. 이것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신라가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감히 법흥왕이 불교를 믿고 싶었는데도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를 했을까요? 단순히 미신을 섬겼기 때문일까요? 아 닙니다. 한반도는 불교가 들어오기 , 이미 기독교가 뿌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자 인 불교가 패자인 기독교의 역사를 다 제거한 것입니다.

경북 영주에는 도마의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였습니다순복음교회 집사님이셨는데, 어느 기도 중에 경북 영주에 가보라는 음성 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들과 함께 막상 가서 보니, 이끼와 숲으로 뒤 덮힌 바위덩어리였답니다. 그 곳엔 아무런 무속행위가 없었고, 넝쿨에 묻혀있었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대나무와 붓을 가지고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 상단부에서 히브리글자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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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분은 이장식 박사입니 다.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 교 수로 갔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시아 고대기독교회사] 책을 내고 도마상의 [타우멤] 도마 란 사실을 학계에 공식 보고하였습니다. 도마상의 왼쪽 밑을 보면 [지전행]이라는 한자가 씌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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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는 여러 서체가 있습니다갑골문이 있고, 전서, 해서, 초서예서체 있는데  서체는 예서체입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시대(BC 206~AD 220) 사용한 것이라 불교가 들 어 오기 전의 석상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가야 건국이 바로 중국 한나라시대입니다. 그리고 불상 에는 발가락 이렇게 묘사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발가락이 선명히 묘사된 것은 바로 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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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이런 주장이 일자 불교계는 문화재청에 요청해[마애보살입상]이라는 팻말을 갖다 붙여 놨습니다. 불교계에서는 도마상을 옛 부터 미륵불상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동네에 미륵불은 개가 있을 없다는 원칙에 따라 도마상은 방치된(?) 미륵상이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넝쿨에 묻혀서 고스란히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마애보살-입상-공고문--144-1.gif


제가 도마상에 대해 더 알아 보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 보았는데12 2 24일에 오마이 뉴스 에 김수종이라는 기자가 현지를 답사하여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강동리 산 87-1번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입상을 보기 위해 갔다. 강동리의 마애입상은 학자들 사이에서 는 고려 초의 보살입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일각에서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刀馬)의 마애인물상으로 비정(比定)되고 있. 불상의 머리는 유실되었으나 목 부분에 턱의 일부가 남아있어 원래는 몸체와 한 돌에 조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위 면의 상태에 따라 어깨와 가슴부분은 고부조(高浮彫)로 새기고 아래는 선으로 조각하였다. 발 아래는 구름문양과 3겹의 연 화좌(蓮花座)가 조성되어 있으며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또한 불상 좌측부에는 4개의 감실형(龕室形)조각이 있는데 이제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곳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내가 이번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왕유마을 마애인물상은 지난 20여 년 동안 기독교인들에게는 예 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의 인물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성지순례지로 방문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소문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언론과 논문 등에 나온 기독교 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왕유리 마애인물상은 예수의 제자인 도마가 일찍이 복음 선교를 위해 인도 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와 뱃길로 김해를 지나 낙동강을 거슬러 영주까지 선교를 다녀간 흔적의 산물이다. 대략 서기 400년경에 제작된 분처상(分處像)으로, 1908년 발견된 중국 돈황석굴의 경 교화상(景敎畵像)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며, 왼쪽 어깨 부분에 쓰인 4자의 히브리어는 '도마의 손과 눈'이라는 성경구절과 일치한다. 하단의 명문은 '야소 화왕 인도자 도마’ [耶蘇(야소)는 花王(화왕) 이고 引導者(인도자)는 刀馬(도마)] 명전행(名全行)'라고 되어있다.

 

 여기에 손은 양손 가락 끝을 빗 장뼈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손등을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는데 이 모양은 기존 불상의 손 모양 과는 전혀 상이하다. 발가락 노출도 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며,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첫눈에 보기에도 그 동안 보아왔던 불 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얼굴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작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었다.’

 

김수종 기자의 말을 들어 보면 영락 없는 도마 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야소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옛날 에는 예수님을 한자로 야소라고 했으며 화왕을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말하며, 인도자는 사도, 도마라고 지전행은 땅끝가지 전한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야소 화왕 인도자 도마 지전행이란 말을 풀이하면 만왕의 왕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도 도마란 뜻이 되겠습니다.. ‘양손가락을 빗장뼈에 대고 한 것은 요한복음 20:27-28에서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들 에게 나타나셨다고 다른 제자들이 말했을 때에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자국을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열흘 후에 도마가 있는 열 한 제자 들에게 다시 나타나 셔서 도마에게 예수님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하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 의 창자국을 만진 후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다 고 고백한 그 사실을 형상화 한 것입니 다. 이것 외에 더 입증할 증명이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도마상의 머리가 없습니다정학봉교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머리를 인근 제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얼굴이 한국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골격과 같다고 보 고합니다. (일제시대 많은 불상의 목이 훼손됐습니다. 경주 일대 불상들이 목이 없습니다)


혹자는 도마가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을 만들었을까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마도 도마가 '지전행'이란 글을 통해 추측해 있습니다. 지전행이란 '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1:8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정말 끝까지 전한 도마 사도의 고백일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도마는 40년간 주로 강과 바다 쪽으로만 다니며 선교했습니다. 유브라데스, 인더스 , ...남인도에도 가보면 사도 도마가 가장 오래 곳은 수로가 많은 케롤라 지역입니다.

곳에는 사도 도마가 세운 7개의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

나뭇결 무늬 유리잔(황남대총남분, 신라)

 

도마-성찬기-15-1.gif


 

대릉원 황남대분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스라엘제로 판명이 났습니다. 현재 김해박물관에는 수 많 은 성찬기를 있고 흔한 불상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 니다.

 

다섯째로 김수로 왕능 입구 현판의 쌍어문(雙魚門)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당시 백제, 신라, 고구려에는 이런 국기 같은 마크를 사용하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야에서만 사용한 것입니다이게 무슨 뜻인지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왕능 입구의 현판의 원래 모습은 왼쪽이데지금은 오른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림은 김해 박물관 옛날 홍보자료에도 실려 있습니다나무 목판이다보니 보수를 하면서 저렇게 원형과 판 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교회가 이런 주장을 하니 불교에서 마치 석탑처럼 왜곡 시켜버린 것입니 다. 그러나 원래(왼쪽) 떡과 물고기를 입으로 먹는 모습입니다.

 

 

쌍어문-16-1.gif


오병이어, 가야Kaya란 인도말로 \'물고기\' (당시 기독교의 상징이었음, IXTHUS)

오병이어-22-1.gif


AD 313년까지는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오병이어)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AD 313 이후부터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쌍어문의 그림은 바로 오병이어를 먹는 모습입니다. 빨간 점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모양에 떡과 물고기 두 마리를 것은 먹는 다는 의미입니다. 물고기의 등지느러미 형태는 이스라엘의 타부가(가버나움) 있는 오병이어 물고기의 모양과 일치합니다.

 

쌍어문에 대한 연구는 김병모박사가 40년을 연구하여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는 어떤 쌍어 신앙 가진 무리들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인도~ 한국~ 일본까지 갔다는 보고를 학계에 냈습니 다. 김병모박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쌍어문의 흔적들은 루트를 지나는 나라들 마 다 다양하게 나타나 있답니다. * 김수로왕비 허황옥(쌍어의 비밀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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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쌍어신앙이 루트를 따라 1세기에 일본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박사는 기원을 BC 2700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너무 나가셨지요. 아시다시 페르시아의 다곤신(오안네스) 판이하게 다릅니다. 김병모박사가 주장한 '쌍어신앙' 사실 오병이어, 기독교의 표식입니다. 결국 바울 로마를 찍고 스페인(서바나서쪽 으로~ 가장 의심 많다고 타박했던 도마 동쪽 까지 복음들고 주었습니다

 

2천년 전의 역사를 무슨 수로 100% 고증시켜주길 바라겠습니까?!!

몇몇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유교,이슬람교는 발생한지 100~600 만에 한반도에 들어왔는데, 유독 기독교만 1800년이 지나서 들어왔다는 것도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소리입니다. 이슬람교는 8세기 통일신라의 국제무역항 울산에 등장합니다.(고려 속요 쌍화점 이슬람의 존재가 나타나 고세종대왕 무슬림에게 조선 복장을 입으라고 명했다고 세종실록 9 4 4일에 실려있습니다.-최상한박사-)

 

"1:8 땅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이루나 하나님은 이루실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정경화 되기 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내용적으로도 많이 아쉽지만 여튼 믿음의 대를 잇지 못하고 고려 불교에 완전히 먹혀버렸습니다. 기껏 동짓날 팥죽이나 쑤어 뿌리 고북어 마리 묶어서 액땜하는 미신 정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왕비인 허씨의 고향은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라는 지역으로 이곳은 힌두교의 성지로서 현재 힌두교 사원이 1천개 이상이 있는 종교의 도시입니다. 힌두교사원 정문 위에는 .우로 마리의 물고기의 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쌍어문양은 주정부의 문장, 박물관 정문, 자동차 번호판, 공무원들의 제복, 제모, 단추에까지도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다신 종교이므로 그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많이 섬기는 기독교신앙도 포함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섯 째  허황옥의 후손들

 

허황옥이 10왕자 2공주를 낳습니다. 후손이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입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왕손이 지금도 인도에 살고 있습니다.

허황옥-공덕비-18-1.gif


김씨 문중 분인 김종필씨가 아유타의 후손을 찾아 김해에 데려와서 허황옥릉에 참배도 하게 하고 기념식수도 해놓았으며 이런 인연으로 페자바드시와 김해시는 자매결연까지 맺었습니다. 실지로 한국어 속에는 인도어(드리비다어) 400여개나 있습니다특히 농사 관련 유사 단어 (-Sal, -Bya, 가래-Kalai, 메뚜기-Metti, -P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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