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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로마서 10:9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부활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부활을 마음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것은 부활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 부활인 것입니다. 내가 장차 부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부활되는 방법과 부활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5-38의 말씀이 이 두 가지에 대한 답변을 명쾌하게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본래 성경에서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부활에 대해 의심과 불신으로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던진 질문인 것입니다. 부활이 이루어 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어떻게 일어나며 만약 부활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어떤 형체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은 부활이 일어날 수 없다는 회의적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부활을 설명하되 ‘자연의 이치’를 가지고 부활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19, 20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악행하는 자들 에게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도록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과 자연 현상 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부활 역시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식물의 씨앗으로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각 식물의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그 속에서 생명이 솟아나는데 그 씨앗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식물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식물의 씨앗을 땅에 심습니다. 그런데 땅 속에서 나온 것은 그 식물의 씨앗과는 다른 형체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수박씨를 땅에 심습니다. 수박씨를 심었는데 수박씨와는 전혀 다른 형체의 수박의 줄기와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인간 육체의 부활도 죽음이란 과정을 거쳐 부활의 몸을 가집니다. 그 부활의 몸은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육체의 원소를 땅 속에서 찾아 전혀 새로운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됩니다.

15:36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리라.”


그래서 수박 씨, 밀의 씨, 사과 씨들과 그 식물들의 형체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바다가제에 대한 글이 있었습니다. 바다가제는 일 년에 꼭 한번 씩 정한 시기, 정한 날에 껍질을 벗고 다시 소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각 바다가제가 그 껍질을 벗는 시기는 다 다른 것입니다. 한 바다 가제가 그 껍질을 벗을 시간이 가까울 때 두꺼운 각질의 옷을 벗고 알몸이 됩니다. 그리고는 빨리 주위의 바위 밑으로 깊숙이 숨습니다. 알몸인 기간 동안에 다른 동물로부터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에 알몸에 새로운 껍질이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때 지난해에 사고로 부셔졌던 지느러미나 다리들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새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바다가제 속에서 성도의 부활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제가 옛 껍질을 벗어 버리듯이 우리 성도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음으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됩니다. 바다가제들이 각각의 껍질 벗는 시간이 다르듯이 우리 성도들의 거듭나는 시간이 다 다릅니다. 바다 가제가 옷을 벗은 동안 바위 밑에서 숨어 그 몸에 새 껍질이 생성되기까지 성장, 성숙해 지듯이 우리 성도들도 교회라는 덮음 속에서 말씀과 믿음행위로써 영적으로 성장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바다가제가 새 껍질을 입어 새로운 바다가제가 되듯이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 공중강림 때에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변화되어 신령체의 몸이 되는데 완전 한 신령체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몸, 영원히 썩지 않고 변하지 않고 늙지 않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몸, 아름다운 몸, 싱싱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1. 잠자리와 매미의 생태를 통해 본 부활의 신비
  잠자리, 매미, 나비, 파리 등은 곤충들입니다. 이 곤충들의 일생은 네 가지 성장 과정을 가집니다. 알의 형태, 애벌레 형태, 고치 형태, 성충의 형태 즉 나비, 잠자리, 파리, 매미인 것입니다.


1) 매미의 경우: 매미의 애벌레는 굼뱅이입니다. 이 굼뱅이의 현주소는 퇴비 무더기 나 쓰레기더미입니다. 굼뱅이가 시간이 지나면 거름더미에서 기어 나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갑니다. 딱딱한 각질의 껍질이 형성되면서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 매미가 됩니다. 하늘을 나르고 나무 위에서 한 여름 동안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무덥고 지겨운 여름날에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매미가 되면 모양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고 사는 장소도 다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됩니다.


2) 나비의 경우: 나비가 배추잎에 알을 깝니다. 애벌레가 되어 배추잎이나 상추잎에 푸른색의 애벌레가 숨어 애써 농사짓는 채소를 망치고 또 훔쳐 먹습니다. 애벌레가 되어 얼마간 지나면 입에서 실을 뽑아내어 고치가 되어 그 속에 나비 모양의 형체로 변하여 그 고치를 뚫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릅니다. 이 나비는 애벌레 속에서 나왔지만 애벌레와는 전혀 다른 형체일 뿐만 아니라 사는 장소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고, 사는 목적도 달라집니다.


 애벌레일 때는 남의 것을 훔쳐 먹고 남의 것을 망치는 삶이었는데 이제 아름다운 나비가 된 후는 사는 장소가 꽃 속에서 살고 하늘에서 삽니다. 활동하는 장소도 달 라 졌습니다. 하늘입니다. 날아다닙니다. 먹는 음식도 땅의 것이 아니라 꽃가루와 꽃 속의 꿀입니다. 달콤한 꿀입니다. 이제 나비가 되어 사는 목적도 달라졌습니다. 애벌레일 때는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었는데 이제 나비가 되어서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삽니다. 꽃에서 꿀을 채취해서 사람에게 꿀도 제공하고 꽃가루를 옮겨서 사람들을 위해 농작물들을 열매 맺게 해서 수확하는 일을 돕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거듭나기 전에는 나 자신 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었는데 하나님을 알고 믿어 거듭난 후에는 먹는 음식이 다르고(하나님의 말씀, 시편 19:10에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고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믿어 천국가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3) 파리의 일생: 파리의 생애에서 성도의 삶과 부활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48 “거기에서는(지옥)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구더기를 성경은 사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더기가 파리가 되지 않고 구더기로 있었기에 지옥 불에 간 것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은 구더기와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불에 들어간 구더기와 같다는 것을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 구더기에 대한 이야기
  옛날 한국의 시골변소를 생각해 봅시다. 변소의 똥통을 들여다보면 수백, 수천의 구더기들이 똥을 먹으며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 구더기 중에 똥을 먹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이 직각으로 매끄럽고 가파른 똥통을 기어오르는 구더기들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올라 왔는지 변소 흙바닥 주변을 기어 다니는 구더기 들을 봅니다. 암갈색의 두꺼운 타원형 고치도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리의 고치입니다. 구더기가 똥통 속에서 기어 나와 몸에서 물질을 내어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갑니다. 그 고치 속에 들어가 지내는 동안에 파리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껍질을 깨고 나와 파리로서 하늘을 날라 다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파리의 일생이 성도의 삶과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되기 전까지 세상의 헛된 것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 인양, 이 세상의 썩을 것을 위하여, 헛된 것, 헛된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6:26,27 “…. 너희가 나를 찿는 것은 표적을 본 까 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무엇이 썩는 양식입니까? 세상의 자연 음식물은 썩는 양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죽이고 싸우고 도둑질하고 시기, 질투,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영원한 세계를 모릅니다. 이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썩을 세상 것들을 위해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마치 똥통 속의 구더기와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마치 똥통 속의 똥을 더 먹겠다고 싸우는 구더기와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9:48의 지옥에 있는 구더기들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것들을 그렇게 추구하고 자기 딴은 가질 만큼 가졌다고 자긍하기도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을 똥과 같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똥통 속을 관찰해보면 똥통 속의 구더기들 중에 먹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열심히 똥통을 기어오르는 구더기 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어오르다가 떨어지고 기어오르다가 떨어지지만 계속 적으로 반복합니다. 직각으로 가파른 그 통의 벽을 기어오르고 오르는데 정말 기적 같은 사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가파른 통속의 벽을 어떻게 기어올라 왔는지 변소 바닥 주변을 보면 당당하게 기어 다니는 구더기들을 봅니다.


  이런 구더기들은 다른 동료 구더기들과 마찬가지로 똥을 뜯어 먹는 일에 열심이다가 어느 날 똥통 속 위로 푸른 하늘을 본 것입니다. 아! 이 똥통 속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도 존재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똥통세계만 알고 똥만 뜯어 먹던 삶을 청산하고 하늘 높이 있는 저 푸른 세계를 소망하면서 그렇게도 힘쓰고 애쓰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는 고독했습니다. 다른 동료 구더기들에게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막 끌어당김을 받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세계를 알게 된 이 구더기는 더 이상 똥통의 것들과 똥통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주변의 동료 구더기들이 미쳤느니, 정신 나갔느니 똥통세계 외에 무슨 하늘 세계가 있느냐며 비난해댔습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120년 동안 방주를 짓던 노아와 같이 고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늘세계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구원 받기 전,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 것들을 추구하려고 그렇게 힘쓰고, 그렇게 세상 것들에 집착했었는데 예수님을 알고, 영원세계가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리를 깨닫고 난 후부터는 그 때부터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성도들의 세계관과 사고와 그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 것들만 의지하는 그런 자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란 미친 자들이요, 정신 나간 사람들로 보일 것입니다. 그 가파른 똥통을 어떻게 기어오르겠다는 생각입니까? 이 세상에 속하면서 하늘나라를 꿈꾸고 하늘나라에 가겠다는 그 발상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랬고, 모세의 삶이 그랬고, 노아의 삶이 그랬습니다. 배는 물가에서 짓는 것이 정상인데, 120년 후에 올 큰비를 대비해 높은 산 위에서 배를 짓습니다. 120년 후를 위해 준비하는 것도 비정상입니다.


  노아의 삶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영원을 추구하는 삶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산 아래 있던 자들,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늘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는 미친 자들로 보았습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영생을 믿기에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우리의 관심을 하늘에 두고 눈을 저 하늘나라에 고정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가사가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1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 합니다. 2절: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3절: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4절: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주여 인도 합소서. 5절: 내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후렴)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물론 그 과정은 넘어지고 자빠지고 떨어질지라도 일어나서 또 걷고, 또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마치 똥통 속의 90도 절벽 같은 그 매끄러운 똥통 벽을 기어오르는 구더기와 같이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리 없는 것입니다. 잠언 24:16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여덟 번째 일어난다.’라고 했습니다. 7전 8기가 성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매미, 파리, 나비, 잠자리들이 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생활환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매미의 애벌레인 굼뱅이의 주소였던 똥거름 더미에서 기어 나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 똥거름 속에서는 매미가 될 수 없습니다. 잠자리의 애벌레인 장구벌레는 더러운 구정물 속에서 기어 나와야 합니다. 구더기 역시 똥통 속에서 기어 나와 높은 곳에서 고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에 애벌레는 열심히 뽕잎을 먹다가 고치를 만들 때쯤 되면 그 상반신을 하늘로 높이 쳐들어 상반신을 고정시킵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누에 애벌레 중에 고치를 만들 준비가 된 애벌레를 골라 마른 짚이나 섶에 올려놓으면 그 입 속에서 실을 내어 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의의 세마포 옷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3. 고난이 가져오는 선물: 성숙

  지금부터 제가 강조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누에의 애벌레나 파리의 애벌레인 구더기가 높은 곳에서 나와 고치를 만들 때 그 속에 들어가는 과정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나와 구원받고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성화의 삶을 사는 것과 비교됩니다. 누에가 고치 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비 모양의 형태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날개가 생기고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을 갖추면서 날아 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거듭난 후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믿음과 말씀으로 영적 성장과 성숙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갑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이 성화의 삶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거룩해 가는 삶인 것입니다. 주님이 공중강림 하시면 죽은 성도들은 부활해서 공중으로 들림 받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순식간에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 받아 하늘로 올라가 주님이 기다리시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주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부활절 무렵에 매일의 양식(daily bread)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아이가 나방이 고치 속에서 자기 고치를 뚫고 나오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한 누에나방이 고치 속에서 고치를 뚫겠다고 퍼드득 거리는 것을 보고 불쌍해서 면도칼로 그 누에고치를 잘라 나방이 고치에서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고치에서 쉽게 나온 그 나방이 몇 번 날개 짓 하다가 푹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한번 신나게 날아 보지도 못하고 기력이 쇠하여 죽어버렸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방이가 고치 속에서 나오려고 고치에 구멍을 내기 위해 고치를 쫓고 날개를 퍼드득 거리면서 힘쓸 때에 성장호르몬이 흘러나와서 날개에 힘을 주고 나방이의 각 지체에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아이 때문에 생략되었으므로 그 중요한 과정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방은 충분히 성장할 수 없었고 힘을 저장할 수 없어 밖에 나오자마자 날아 보려고 몇 번 퍼드득 거리다가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귀가 활개치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죄지어 고통당하고, 회개하고, 힘쓰고 애씁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핍박당하고, 박해당하고, 외롭고, 고독하며, 괴롭고 아픕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이런 어려움이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방과 같이 영적 힘이 없어 하늘을 날아 갈 수 없어 공중 들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는 것이 힘드시는 가봅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로 영적 힘을 얻어 공중 들림 받고 하늘을 능히 날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하여 쉬운 길만 찾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믿음 생활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해서 들림 받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시 구더기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일단 파리가 고치에서 나와 하늘을 날게 되면 왕궁으로 날아가서 임금님이 잡수시기도 전에 수라상을 시식하고 임금님과 겸상해서 잔칫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듯이 우리도 휴거되어 하나님 아버지 잔칫상에서 마주 앉아 극치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결론적으로 파리의 이전 모습이 구더기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파리가 될 수 있느냐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이 있느니라.”

 

똥을 먹고 살던 구더기가 변화되어 파리가 되어 수라상을 시식하듯이 썩을 양식만을 위해서만 힘쓰고 애쓰던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 신령한 말씀의 음식을 먹게 되고, 부활하여 하늘나라의 음식인 생명과일과 생명수를 영원토록 먹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21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실제로 구더기가 파리로 되는 것보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되는 것이 더 큰 변화입니다.


 끝으로 잠자리 애벌레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겠습니다. 오래된 연못 바닥에 잠자리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 위에 떠있는 연꽃줄기를 타고 물 위로 기어 올라간 수많은 자기 친구들이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다음 번부터는 누구든지 일단 물 위로 올라간 후에는 반드시 연못 속으로 돌아와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 중 하나가 위로 올라갈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애벌레는 물 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연못 위를 맴돌면서 연못속의 자기 친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닫기를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볼 수 있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를, 바로 자기들과 똑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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